표절보다는 정신의 식민화가 문제다
 - 이명원의 '해독' 중에서


  올해 들어 신경숙씨는 독자들을 두번 놀라게 했다. 문학평론가 남진우씨와의 '깜짝 결혼'이 그 하나이며,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표절논쟁이 다른 그 하나임은 독자들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전자의 경우, 그것은 흥미는 있을망정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문제이므로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사항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신경숙의 문학장에서의 위치를 고려해볼때 사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 보다 치열하게 거론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판단한다.

90년대 초반. 진보 이념의 급진적인 퇴조가 불러 일으킨 정신적 공황의식을 비집고 다이너마이트처럼 당혹스럽게 퍼져나간 '신경숙 현상'의 한 계기를 이루었던 <풍금이 있던 자리>의 다소 몽롱한 환유의 연애편지를 독자들도 기억하실 것이다. 이 소설은 그 자체로서는 단아한 소품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전 문단의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물론 이후 90년대 소설의 경향성 변모를 상징적으로 예시하는 표지로서의 역활을 감당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공적 담론의 상대적인 빈곤화와 퇴각이라는 현상과 맞물리며 작동되었던 사적개인의 내면에 대한 공세적인 자기노출이 별다른 이의제기 없이 ('창비'진영의 비평가들이 보여주었던 동시다발적인 뜻밖의 찬사들!) 한 시대의 소설적 변화의 대표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내 개인의 판단으로는 90년대 초반의 '신경숙 현상'은 전면적인 긍정도 또 절대적인 부정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긍정적이라면 인간이 신념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기도 하는 이념적 동물이지만, 그 이념의 동물이 '사랑의 이기심' 때문에 사태를 그르치기도 한다는 조금 낯간지러운 복합성의 성찰을 신경숙이 내면화 시켜 주었다는데 있다. 다시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라면 소설의 다채로운 경향 중의 한 구성요소에 불과했을 것을 두고 마치 한 시대의 방향타인 것처럼 떠들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비평계와 언론계의 '하이에나적 공모'가 자연스럽게 확대되었다는 점에 있다.

적어도 신경숙을 기점으로 우리의 비평가들은 작가를 대중문화의 스타시스템이 그러한 것처럼, 빨아먹고 손쉽게 버리는 빙과류처럼 취급한 경향을 확산시켰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겨우 십년만에 신경숙은 일급의 작가에서 표절작가로 하향이동하는 '변신'을 몸소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쉽게 달아오르고 급격하게 관심이 식어버리는 '냄비문화'의 부정성이 눈에 띄게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신경숙의 표절논쟁이 한겨레신문에서 진행중이라는 말씀을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드려야겠다. 신경숙이 타인의 작품을 표절하여 자신의 작품 소재로 활용했다는 이야기가 처음으로 제시된 것은 <작가세계> 1999년 가을호에 발표된 문학비평가 박철화씨의 <여성성의 글쓰기, 대화와 성숙으로>라는 글에서였다. 이 글에서 박철화씨는 신경숙의 <기차는 떠나네>와 <기억찾기>가 마루야마 겐지와 파트릭 모디아노의소설을 표절했다는 혐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신경숙의 표절의혹이 보다 증폭된 계기는 한겨레 신문 1999년 9월21일자에 실린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 통신'에서였다. 최재봉기자는 신경숙씨가 문학동네 1999년 여름호에 발표했던 <딸기밭>이 재미유학생 안승준씨 유고집의 여러부분을 차용한 표절소설이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최재봉씨의 이러한 지적은 매우 구체적인 현장검증(?)을 동반한 것이므로 신경숙씨는 <글마을 통신에 대한 기고문>(한겨레 1999.9.28)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으로 해명을 대신했다. 즉"승준씨의 어머니에게서 책을 받아 읽고 너무도 슬프고 감동적이어서 언젠가소설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유족에게 누가 될까봐 누가 될까바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고 밝혔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기이한 것은 신경숙씨가 자신의 표절을 인정하다가 갑자기 평론가 박철화씨를 물고 늘어지는 대목이다. 박철화씨의 또 다른 표절의혹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신경숙씨는 "박씨자신 장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한 만큼 다른 작가에 대해 언급할 때는 세심한 배려와 치밀한 분석이 따라야 한다"고 전제한 후 최재봉씨의 기사에 "나의 불찰에 대한 지적이 박씨의 터무니 없는 주장과 같이 배치되어 심적부담을 느낀다"는 뼈 있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한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신경숙씨는 박철화씨가 소설가인 만큼 세심한 배려와 치밀한 분석을 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러한 배려와 치밀한 분석은 굳이 소설가가 아니라도 아니 비평가들이 보다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분야 이기도 한 것이다. 게다가 박철화씨는 사실 소설가이기보다는 비평가로서 더 좋은 역량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 터가 아닌가.....

어쨌든 신경숙씨는 자신의 표절문제를 박철화씨의 비평가로서의 역량부족이라는 문제로 살짝 바꿔치기하는 행태를 보여주었거니와,박철화씨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던지 한겨레신문 1999년 10월 5일자에 <신경숙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게재하였던 것이다. 박철화씨가 신경숙씨의 소설을 표절이라고 단정짓는 근거는 두가지다. 표절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 남의 문장을 슬쩍 도용하는 것, 둘째 남의 글의 구조나 이미지를 빌려오는 것. 그리고 나서 그는 "앞의 표절이 단순한 아둔함에 가깝다면 뒤의 것은 고의적인 은폐기도로 해서 이중으로 독자를 속이는 것"이라고 매섭게 질타를 한 후 신경숙씨는 후자의 경우라고 매섭게 질타한다. 나름의 현장검증이 동반되었음은 물론이다. 지금까의 내용이 소위 신경숙의 표절을 둘러싼 논쟁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

이 상까지의 내용을 읽고나서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지금까지의 논의 방향이 신경숙씨의 표절논쟁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앞으로는 신경숙표절의 진위에 대한 혹독한 현장검증(?)이 이루어질 것 같아. 그렇지 않을까?" 와 같은 추측 말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신경숙의 소설이 표절이냐 아니냐 어찌보면 진부하면서도 동시에 생산성이 없는 그런 논의를 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거야 박철화씨나 최재봉씨가 이미 상당부분 규명한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내가 아무리 그러한 작업을 수행한다고 해 보았자 이 두분의 작업의 성과를 넘어서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논의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표절의 문제를 한개인의 윤리의식 결여라는 소극적측면에서 파악하기보다는 보다 넓은 문화적 지평에서 이해해보자는 이야기이다. 문화적 지평이라니? 표절은 문화적 자본이 열등한 사람이 다 우월한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자본을 도용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 때 우리가 주목할 점은 90년대 이후 우리의 문학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표절의 발생론적 배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90년대 문학계에서는 유난히 많은 표절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90년대 초반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는 소설을 통해 가장 정점에 이른 이러한 논의들은 이후에 김현과 김윤식에 대한논의를 거쳐 최근의 신경숙에까지 이르고 있다.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많은 경우, 표절의 원천이 국내의 작가, 사상가의 그것이기 버다는 구미의 작가, 사상가의 저작에서였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서는 무라카미 하루끼, 가라타니 고진 등의 일본 문화인의 영향도 상당수준 발견되고 있는 터이다. 이러한 일련의진행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의 뇌리에 상당히 강렬하게 떠올랐던 생각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한 작가의 표절행위는 작가개인의 윤리의식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완전하게 설명될 수는 없다. 개인의 윤리의식을 넘어 보다 넓은 지평에서 표절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타자의 저작,혹은 구미의 저작을 표절 할 수 밖에 없는 한국지식 사회의 '문화의 빈곤'에서 그 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을까?

'주체'와 타자'라는 개념을 활용하자. 이러한 개념을 활용해서 표절을 정의하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표 절이란 창작의 주체가 타자의 창작물에 아도적으로 매혹된 결과 주체로서의 '자기의식'을 상실하고 타자화된 결과 나타난 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주체가 자기의식을 상실하고 타자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이러한 현상을 널게 보아 '정신의 식민화'현상으로 규정할수 있는 상황이다. 정신의 식민화 현상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이 지식사회라는 점은 매우 우울한 일이다.

자 기의식을 상실한 주체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니다. 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자기문화를 자생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할 능력이 없는 집단은 언제든지 타문화의 매혹적인 거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구미의 앞선 이론은 재빨리 들여와 한국사회에 성급하게 적용하는데서 학문적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우리사회에는 상당수 존재한다. 오해없기 바란다. 내가 여기서 비판하고 있는 것은 구미의 이론을 들여와 그것을 한국사회에 적용시켰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지않다. 문제는 적용의 '맥락부재'이다.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상황에서 수입된 이론,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맥락 속에서 육화되지 않은 날 것의 이론을 거칠게 적용하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문제는 '자기만의 언어'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타인의 어법과 뉘앙스를 빌린 '앵무새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현실 속에서 육화되어 자의식을 내장한 그런 언어를 사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비유컨데 가수현철씨가 서태지의<난알아요>를 부른다고 현철씨가 서태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표절이라는 문제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문제인 것은 자기만의 언어를 버리고 앵무새의 언어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그러니까 자기 정신의 의미있는 성찰을 수행하는 대신, '정신의 식민화' 상태에 자발적으로 편입해 들어갔다는 점에서 그렇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표절의 발생동기를 설명하는데 효과적인 비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표절이 아니라 정신의 식민화다. 그것은 한 작가가 다른 작가의 저작을 베꼈다는 차원에서 논의 되기보다는 그러한 정황을 산출하게 한 의식의 발생론적 기원을 탐구하는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신경숙씨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그가 표절의 한 주체로서 등장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지속적인 자기갱신'을 이루지 못한데서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미 이러한 문제를 <두려운 낯섦-소설이 일상성에 대응하는 방식>(문예중앙 1999년 여름호)에서 제기한 바 있다. 즉 신경숙 소설의 특징은 '남용된 연민'의 세계로 규정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소설적 경향이 90년대 초반의공간에서는 일정한 의미를 띨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90년대 후반인 현재까지 갱신에의 노력이 없이 지속됨에 따라 소설의 밀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작가적 한계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 글에서의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갱신의 노력부족은 신경숙개인에게만 한정되는 현상이기보다는 90년대 문학계 더 나아가 우리 지식 사회의 전반으로 확대될 수 있는 문제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의 지식인들은 자기갱신의 노력은 배제한 채 구미의 텍스트에 자발적으로 매혹되는형국을 보이곤 했던 것이다. 들리즈와 가타리, 부르디외,이리가레이 등에 대한 최근 지식사회의 압도적인 관심확대는 많은 부분, 자의식 없는 매혹적인 추종으로 나아가고있는 감이 없지 않다. 물론 최근 들어 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기화의 언어'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는 기꺼이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문제는 표절이 아니라 정신의 식민화 경향이다. '자기만의 언어'를 갖지 못한 작가는 '타인의 언어'를 앵무새처럼 반복할 수 밖에 엇는 것이다. '자기만의 이론'을 갖지못한 지식인은 '타인의 이론'을 앵무새처럼 반복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주체로서의 자기의식을 버리고 타자에 동화 되었을때 나타나는 폐해의 한 양상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경숙씨의 표절에 관한 논쟁이 한 작가의 윤리적 의식에 대한 공방전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우리지식 사회의 문화적 자기의식에 대한 열린 논의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2003.